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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의회제도를 탄생시킨 시몽 드 몽포르의 옥스퍼스 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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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2>


영국에서 제일 인기 없던 존왕이 프랑스 내의 영지 대부분을 상실한 채 대헌장에 서명한 이듬해에 급사한다. 그 당시 그의 아들 헨리 3세(1207-1272)는 겨우 9살이었지만 왕이 되어 중신들의 섭정으로 이어지다 20세에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교양이 풍부하고 인정도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인품은 좋았으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거기서 거기. 대헌장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고 대신 선왕이 잃은 땅을 다시 찾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썼기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그는 프로방스의 엘레노와 결혼했다. 그리고 외척들을 끌어들여 그들에게 영지를 하사하고 작위를 남발했다. 외척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은 후 재혼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9명의 이복 동생들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왕의 사유재산을 나눠 준 것이라면 몰라도 잉글랜드 토박이 귀족들의 몫을 가지고 인심을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

왕족의 일원인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는 할머니 소유인 레스터 영지와 백작 지위를 상속받기 위해 잉글랜드로 건너왔다. 그리곤 헨리 3세의 여동생에게 반해 결혼한다. 그는 왕의 친,인척 중 유일하게 거칠지만 용맹스런 전사이면서 뛰어난 관리자의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래서 왕은 그를 고문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역시 잉글랜드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 했다.

그 당시 아키텐 남서부에 위치한 가스코뉴는 프랑스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잉글랜드의 영지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잉글랜드를 벗어나려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웃 나라인 나바르나 프랑스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그래서 헨리 3세는 고문관 시몽 드 몽포르를 파견했다. 그는 특유의 전사로서의 능력을 발휘, 단시일 내에 진압하여 왕에게 충성했다. 그런데 왕은 안정을 되찾은 그곳을 시몽이 아닌 장남 에드워드에게 주었다. 그래서 시몽이 공을 세운 후 얻은 것은 영지가 아니라 왕에 대한 배신감뿐.
그런데 헨리3세의 땅에 대한 집착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1254년에는 시칠리아를 치려는 교황 이노첸시오 4세와 모종의 거래를 한다. 군자금을 갖고와 전쟁을 거들테니 전쟁에 이기면 시칠리아를 차남 에드먼드에게 넘기라는 협약. 그래서 귀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며 시칠리아 원정을 준비하자 마침내 귀족들의 인내심은 한계선을 넘었다.

1258년 귀족들은 시몽 드 몽포르를 중심으로 사상 최초의 헌법으로 여겨지는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ford)를 작성했다. 이는 대헌장의 근본 정신인 인권을 한번 더 강조한 것으로, 나라는 한 명의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제도 하에 임명된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다스려져야 함을 강조한 것. 여기서 체계적인 제도 하에 임명된 고문들이란 후에 상원이 되는 교회의 성직자와 귀족들, 그리고 각 주에서 2명의 대표로 구성된 하원들로 이들은 상인, 지식인 등 주로 일반 엘리트 출신이다.

귀족들의 협박에 못 이겨 겨우 서명은 했지만 헨리 3세는 애초부터 이것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청원, 이 조항을 무효로 해 달라고 간청하며 이 문서를 무시해 버렸다. 만약에 이 때 이것을 무시하지 않고 잘 지켰다면? 역사는 그를 최초로 민주헌법을 준수한 성군으로 떠받들며 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무시한 댓가로 제 2차 남작 전쟁(Second Barons’ War)으로 이어진다.

헨리 3세는 동생 콘월 공과 장남인 에드워드 왕자를 앞세워 반란군을 진압하려 나섰다. 이 루이스 전투는 숫적으로 보나 군장비로 보나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왕당파 군인이었지만 왠일인지 열세인 반란군에게 밀려 패배, 왕자와 함께 포로로 갇혀 폐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시몽 드 몽포르를 중심으로한 반란군은 1265년 드디어 사상 최초의 의회를 소집하는 것으로 승전가를 대신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영국 민주주의의 첫걸음으로 보기도 한다. 잠깐이지만 정권이 왕실의 후손에게 세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몽 드 몽포르가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를 중심으로 귀족들과 연합해서 왕국을 통치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가 반란을 통해 집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각 지역의 대표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듣는 대자문회의를 주관했다. 이 때 모인 회의의 명칭이 의논하다라는 뜻을 가진 Parliament.
여기에 120명의 성직자와 23명의 귀족 대표, 그리고 각 주에서 선출된 2명의 기사 대표와 각 도시에서 선출된 2명의 시민 대표가 모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국사는 몇명의 고위층에서 이뤄지고 나머지는 자문위원 정도의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의회와는 다르지만 무늬는 비슷하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를 최초의 잉글랜드 의회로 보고 있다.

그 후 탈옥에 성공한 에드워드 왕자는 시몽을 반대하는 세력을 모아 왕권을 다시 찾기 위해 이브샴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왕자는 시몽 드 몽포르를 처참하게 사살하고 아버지 헨리 3세에게 다시 왕권을 되찾아 주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노쇠한 헨리 3세는 실권은 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헨리3세는 평소에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를 흠모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그 당시 유행하던 고딕양식으로 재건했다. 아, 물론 그 당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프랑스 건축물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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