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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설거지 그리고 배추꽃 사과 - 권영상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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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영하 17도의 혹한 엄습도 한두 차례가 아니다. 한 주일 고비를 넘기고 나면 숨 돌릴 사이 없이 더 무서운 혹한이 찾아온다. 조금 흘려놓은 시골집 수돗물을 단속하러 나는 겨울 내내 안성을 오르내렸다. 딸아이는 대학에서 가져온 프로젝트로 밤을 새우고, 아내는 전시 작품이 촉박하다며 집안일에 손을 놓은지 오래다.

오늘은 설거지 일로 싫은 소리가 오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는 얼른 집을 나섰다. 가끔 가던 도서관을 찾았다. 나 같은 처지의 남자들이 거기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힘들여 찾아간 그곳을 나와 혼자 추운 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길 옆 카페에 찾아 들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따스한 분위기에 마음을 막 녹이고 있을 때다.

들어설 때부터 통화를 하던 옆자리 여자분이 한사코 통화 중이다. 목소리가 높지는 않지만 일정하게 쪽 고른 톤으로 쉬지 않고 발설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몹시 거슬렸다. 좀 있다 끝내겠지, 했지만 그의 통화는 끝나지 않았다. 비켜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쫓기듯 거길 빠져나왔다.
좀 춥기는 하겠지만 안성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왔다.
앞 베란다에 햇볕이 소복이 들어와 있었다.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거실 문을 열고 나가 섰다. 아파트 마당의 눈은 아직 하얗다. 이 혹한에 저게 녹으려면 또 며칠이 걸리겠다. 건너편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멀리 보이는 산도 희끗희끗하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산도 숲 아래엔 눈이 잔뜩 쌓여 있을 테고, 찬바람이 불고 있을 테다.

전철과 버스를 타고 돌아다닌 도심과 달리 집 바깥 풍경은 한겨울이다.
음식 그릇을 담아 갈 가방을 집어 드는데 눈앞에 노란 꽃이 들어왔다. 아침까지도 못 보던 배추꽃이다. 꽃은 아내가 창가 볕드는 곳에 놓아둔 유리컵 안에서 피고 있다. 배추 잎을 하나하나 떼고 남은 고갱이를 아내는 유리컵에 담아 조금씩 물을 부어주었다. 처음엔 노랗던 그 고갱이가 그동안 볕을 머금어 검푸른 초록이 됐다. 이 추운 혹한에도 배추 고갱이는 바깥 사정과 달리 예쁜 봄을 찾아내어 꽃을 피웠다.

작지만 별처럼 예쁘고 앙증맞다.
고갱이 꽃을 피우는 배추는 안성에서 내가 키운 거다. 아내는 배추 고갱이도 버리지 못하여 물컵에 담아 겨울 볕에 내놓았다. 아침에 화를 내기는 했지만 아내에겐 이런 옛날식 정서가 있다. 우유병에 물을 담고 양파를 얹어놓거나 구청에서 베어낸 나뭇가지를 꺾어와 겨울 내내 창가 물병에 꽂아놓고 멀리 있는 봄을 기다릴 줄 안다.

나는 안성으로 내려가려던 생각을 접고 짐 가방을 제 자리에 둔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점심을 못 먹었다. 나는 아무소리 않고 쌀을 떠다 밥솥에 밥을 안친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호박죽 만들어 놨어.”내가 나간 사이, 그림 그리던 손을 놓고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만든 모양이다.
“맛이 좋네 뭐!”
나는 그렇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며 점심을 먹는다.
배추 고갱이가 노랗게 꽃피운 유리컵을 들고 와 아내가 좋으라고 식탁 위에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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