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삶과 역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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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장벽, 문화충격보다 외로움 때문에 힘들었다
한국전쟁과 전쟁신부의 역사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코리아월드(발행인 Phil 양)는 마침 미주이민 12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미주한인 동포사회의 발전과 도전 1903-1923>에 소개된 ‘국제결혼으로 미주에 진출한 한인여성들의 역사’를 접하게 됐다.
필자인 정 나오미(미국 알칸사한인회장)씨의 승락을 받고 이 글을 정리해 코리아월드 단독으로 ‘[특별기고]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지난호에 이어서>
초기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은 처음부터 미군 남편들을 따라 남편들의 군복무지가 있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정착했다. 앞서 밝혔듯이 당시 미국 군사기지들은 대도시에서 떨어진 중소도시나 농촌 지역에 있었으며, 한국인들이 전혀 살지 않았다. 언어장벽과 문화충격보다도 외로움 때문에 참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혈혈단신으로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오로지 남편 하나만을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같은 부대 안에서 만난 국제결혼 한인여성들끼리 친목 단체를 형성하여 한국 음식을 나눠 먹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다음은 이들이 만든 주요 단체들이다.
한미부인회(Korean American Wives Association, KAWA)
한미부인회는 1963년 워싱턴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 6명이 모여, 한국여성들이 미국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취지로 전 에드워드(한국명 송전기) 여사를 회장으로 하여 창립됐다. 친목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점점 회원이 증가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언어장벽과 문화충격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제결혼 여성들과 한국 음식, 주류사회 정보를 필요로 하는 유학생들이 많아졌다. 워싱턴DC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도 어려움을 당한 미주 한인동포들을 위해 한미부인회의 도움을 요청해 올 정도로 한인사회와 주류사회를 아우르는 ‘친정어머니’ 같은 단체로 성장했다.
1970년대 한인이민 정착과 한인사회 형성에 중추적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인회관 설립에 후원하기 위해 모금 파티를 열고, 모금된 5천 달러를 쾌척했다. 1980년에는 한국에서 혼혈아동 입양사업을 추진하여 12가구에 30명을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입양 후에도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할 때까지 계속 도움을 줬다. 도움이 필요한 주류사회를 찾아 봉사활동을 활발히 했는데, 특별히 양로원과 소년원을 찾아가 그들에게 필요한 의류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또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보은 봉사를 베풀어 한미동맹 결속을 강화했다. 점차 회원들이 증가하며 활동도 다양해지고 활발해졌다. 한미부인회의 활동 반경이 커짐에 따라 회원자격을 국제결혼 한인여성들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의 여성들까지 회원자격을 확대하면서 이견차이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자체건물을 마련할 정도로 단체가 성장했다. 하지만 결국 유감스럽게도 1982년에 선거의 후유증으로 단체가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워싱턴여성회(Washington Korean Women’s Society, WKWS)
1982년 기존의 ‘한미부인회’(KAWA, 1963년 발족)에서 독립하여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로만 구성된 조직으로, 출범부터 문화와 장학사업을 목표로 했다. 특히, 한국과 미국 문화에대한 이해 증진을 목표로 정하고, 한국의 혼혈학생들과 미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초대회장이었던 고(故) 수영 휘태커(임수영) 회장은 미주한인총연합회에서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한인단체와 협력하여 어느 단체를 불문하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단체를 돕고 있다.
휘태커 초대회장은 버지니아한인회 직업학교에서 20년 넘게 재봉을 가르쳐왔다. 재봉을 배운 많은 회원과 한인들이 세탁소 등 직장에 취직이 되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첫 봉급의 몇 퍼센트를 부인회의 장학사업에 후원하기도 했다.
그림과 도자기에 재능이 있는 회원들이 그림과 도자기 전시회를 개최하고, 제자양성에도 열심이다. 특히, 오진희 씨는 도자기를 가르치면서 매년 수입금을 단체에 후원하고 있으며, 메킨 타이어 부인은 영어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수년간 교육 봉사를 하고 있다. 워싱턴여성회는 설립목적에 따라 워싱턴 코러스 축제, 버지니아한인회 주최 9월 박람회, 워싱턴 한인노인연합회의 구정잔치 등과 매년 크리스마스 뱅크윗 장학금 모금잔치로 로컬 고등학교 장학사업 등 워싱턴지역 한인사회 곳곳에서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문화학교 (ACA)의 혼혈학생들에게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입양인들에게 뿌리를 찾아주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한미여성재단 (The Organization of Korean American Women, OKAW)
1986년 기존의 ‘한미부인회’(KAWA 1963년 발족)에서 실질적인 봉사활동에 임하기 위해 ‘한미여성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회원자격을 국제결혼 한인여성들뿐만 아니라 워싱턴DC 인근 지역 한인여성들까지 확장했다.
워싱턴지역 한인이민사회가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정폭력으로 권익을 침해당하는 등 어려움에 처한 국제결혼 한인여성 포함 한인여성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장소(국제결혼에 실패하여 갈 곳 없는 한국여성들을 보호하고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한 작은 집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 마련과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비영리단체로, 연방정부 국세청 세무법 501조 C항 3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등록했다.
핫라인 설치(전화상담 제공), 임시 쉘터 운영과 관리(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임시거처), 사회봉사, 교육 문화 프로그램 제공, 여성인권 보호 등의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해마다 쉘터인 ‘희망의 집’ 운영을 위한 기금마련 ‘1일 찻집’과 ‘디너 행사’를 개최하며 워싱턴DC 지역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봉사활동을 통해 모범단체로 60년째 자리매김을 이어오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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